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며 한 시대를 대표한 정치인
작성일 : 2026.04.25 11:20 수정일 : 2026.04.25 11:28 작성자 : 한장완 (asia0098@naver.com)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며 현실적인 노선을 택한 그의 삶과 행보"

출생과 초기 항일독립운동
1905년 출생한 유진산 선생은 일제강점기 엄혹한 환경에서 와세다대학 재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된 뒤,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조국 독립을 향한 그의 헌신은 평생의 신념이자 정치·사회 활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정치 입문과 의회주의자 활동
광복 뒤, 선생은 정치에 입문해 7선 국회의원으로 한국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특히 신민당 총재를 역임하며 야당을 대표하는 거물로 성장하였고, 극심한 대립과 갈등 상황 속에서도 타협과 대화를 통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의회주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대목입니다.
정치 실용주의와 ‘진산 파동’ 논란
1971년 8대 총선에서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출마하는 ‘진산 파동’ 사건이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의 결탁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쿠라’ 논쟁에 휘말렸으나, 이는 그가 현실 정치에서 실용주의적 선택을 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주요 정책과 민주주의 수호
유진산 선생은 교육 발전 및 민주주의 강화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기초학력 보장과 교육 제도 개선 정책, 그리고 의회 민주적 운영 강화에 기여했으며, 권위주의 정치 아래서도 야당으로 민주주의 수호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이 한국 민주정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국민과 정치사에 끼친 영향
선생의 7선 국회의원 활동과 야당 지도자 역할은 한국 정당 정치 제도 확립과 의회 민주 문화의 정착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오늘날 정치사의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며 한 시대를 대표한 진정한 정치인의 면모입니다.
마무리 평가
유진산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을 거친 인물입니다.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며 현실적인 노선을 택한 그의 삶과 행보는 오늘날에도 깊은 성찰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2025년 51주기 추도식 기념사진>
옥계 유진산 선생 약력
◎ 출생 : 1905.10.18
◎ 사망 : 1974.04.28
◎ 본관 : 문화(文化)
◎ 본명 : 영필(永弼)
◎ 필명 : 진산(珍山)
◎ 아호 : 옥계(玉溪)
1905년 10월 18일 현)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부친 유경덕(柳敬德)과
모친 김경하(金敬夏)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관립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현)경기고등학교)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 교내에 첫날『대한독립만세』벽보를 붙이고 이튿날『조선민족대동단결』벽보를 붙여 항일운동. 이 사건으로 일본 교장이 회유했으나 거부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 자퇴
1920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전학
1923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1926년 김현신(金賢信)과 결혼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정경학부 입학
1931년 정경학부 3학년 재학중 독서회 사건으로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
투옥되었다. 독서회사건은 신흥과학연구회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독서회로 항일운동에 근본을 두고 조직된 일본 내 조선 유학생 단체였다.
1932년 귀국하여 쌍엽농민회 조직(회장을 맡음)
1933년 농민운동으로 일본경찰 감시대상이 되어 중국망명,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 에서 한인회 조직, 충칭(重慶)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독립운동.
1934년 일본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35년 「농민독본(農民讀本)」의 편집을 하면서 필명을 眞山, 나중에 珍山으로 고쳐
광복까지 활동.
1945년 비밀결사 「흥국회」 조직
1946년 대한민주청년총동맹 조직(회장취임)
1948년 청년조선총동맹(靑年朝鮮總同盟) 최고위원
1950년 민주국민당 총무부장
1952년 6월 20일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어 동년 8월 14일 석방.
1954년 5월 20일 錦山에서 출마 제3대의원으로 당선, 사십오인 개헌 파동때
호헌동지회 결성
1957년 9월 협상선거법(協商選擧法) 야당측 협상대표
1958년 5.2선거에서 제4대 의원으로 당선(錦山) 민주당 원내총무 피선
1960년 불온문서 원면부정(原綿不正) 사건 국회 조사위원장 7월 29일 선거에서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錦山) 11월 신민당 창당 간사장 취임
1961년 5월 아시아 반공대회 참석차 도일, 5.16혁명후 귀국, 6월 5일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 5개월후 석방
1962년 3월 22일 백조 그릴에서 군정 연장 반대 민주구국 선언 대회를 주도
민주당「국민의 당」창당
1963년 11월 26일 민정당 전국구후보로 제6代 당선, 민정당 기획위원회 의장
1966년 7월 19일 민중당 운영회의 부의장 취임
1967년 영등포구에서 제7대 국회의원 당선
1970년 2월 1일 신민당 당수에 피선
1971년 5월 25일 신민당 후보로 전국구 제8대의원에 당선
1972년 9월 26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재선
1973년 1월 22일 신민당 당수직 사퇴. 2월 27일 선거 錦山에서 출마 제9대의원 당선
5월 7일 정기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재선
1974년 1월 11일 연세대 의료원에서 결장암 수술
4월 28일 한양대 부속병원에서 別世
5월 2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영결식 거행.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先塋下 安葬
<추모의 글>
![]() |
|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 정대철 |
저는 옥계 유진산 선생을 특히 네 가지 이유로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첫째, 조국광복을 위해 항일독립운동을 펴신 분이십니다.
경성고보 2학년이던 유영필은 1919년 3월 1일에 학교 교실 곳곳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벽보를 붙였습니다. 다음날 밤 또 다시 학교 담벼락에 ‘조선민족 대동단결하라’는 벽보를 붙이다가 교장에게 직접 덜미를 잡혔습니다. 자퇴를 강요당하고 보성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경성고보는 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며 유영필은 선생의 학생 때 이름입니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생 시절에도 도쿄 조선인 유학생을 결집시켜 ‘신흥과학 연구회’라는 독서모임을 만들어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항하는 이론체계를 확립했으며 항일투쟁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유진산 선생은 내란죄로 입건되어 이치가야 형무소에 유치되었고 가혹한 고문과 함께 심문을 당했습니다. 끝내 공부를 마치지 못한 채 와세다를 중퇴하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의 일원으로 친일파 단속에 앞장섰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암살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둘째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펼치신 분이십니다.
옥계는 일제의 착취와 수탈에 대항하여 싸우는 방안을 모색하셨습니다. 그 하나로 향촌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를 위해 강제 귀국 후 ‘쌍엽농민회’를 조직하여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의 목표는 민족의식을 자각시키는 민중의 항일운동이었고 이로 인해 일제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일제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도 농촌계몽에 필요한 ‘농민독본’을 집필하였습니다.
해방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을 막고 그들의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청년조직인 ‘흥국사’라는 청년조직을 결성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년들 스스로가 만든 ‘대한혁신 청년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도 되었습니다.
셋째, 이나라 대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대화, 타협, 조정의 정치를 펼치신 분입니다.
옥계는 정당정치를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정치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비판을 받을지라도 일관되게 이를 주장하였습니다.
선생은 ‘정치란 이해가 충돌하는 견해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합일점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완전 승리나, 완전 패배는 피하여야 하며 공존의 논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것이 민주정치라고 역설하신 분입니다.
군사 구데타 세력을 혁파하고 조국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라는 강경투쟁을 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에 대하여 진산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비분강개 투쟁일변도로 정치를 하는 것은 대단히 비효과적이라고 보는 온건 정치인이었습니다.
옥계는 참여 속에 개혁을 도모하는 현실주의 정치인이었으나 파벌, 밀실, 막후정치의 색채가 짙어지면서 그의 정치철학은 대중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옥계는 알아주는 이가 있든 없든 오직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다 가신분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죽을힘을 다해 대의민주정치의 토대를 한겹 한겹 쌓아 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인간미가 있으신 분이며 청빈한 생활을 사셨습니다.
만석군의 아들이었으나 호의호식하기보다는 도리어 재산을 털어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동지들을 돌보는데 힘썼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많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동지를 위해 돈을 쓸 때가 가장 보람 있고 기쁨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진산계가 많은 추종자가 있는 최대파벌이 된 것도 그의 따뜻한 인간미가 주요 요인이었다고 확신합니다.
궁핍한 살림에 힘들어하던 당원이 찾아오자 부인의 패물을 한 움큼 들려 보낸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맹장수술비가 없어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당원의 부인을 위해 자신의 집 안방에 놓여 있는 TV를 팔아서 수술비를 보태주라고 지시하는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유석 조병옥박사가 타계 하신 후 미망인 노여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매달 생활비를 보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 입니다.
안국동 당사 근처 음식점에서 만나 뵈었을 때 옥계 선생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군! 아버지하고는 경쟁은 좀 하지만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재? 그러나 당나귀(정일형)는 버드나무(유진산)에 매어 놓아야 되는 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재?”라고 유머를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용돈도 두둑이 주신걸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옥계 선생님! 존경하고 그립습니다.
유진산 아저씨! 보고 싶습니다.
금주의 핫 뉴스